국민학교 세대인 나는 국민학교 졸업 때까지 시골(아니 그건 너무 평범한 표현이고 사실은 깡촌)에서 보냈다.
학교 교사이셨던 아버지 덕분(?)이었다.
4학년까지 살던 경기도 광주의 우리 동네는 지금은 온통 골프장이 들어서 있지만 그 시절엔 내가 겨우 2학년 때가 돼서야 전기가 들어온 오지 중의 오지였다.
그리고 5학년 때 이사를 한 곳은 요즘은 실미도, 천국의 계단 촬영지로 잘 알려진 ‘무의도’란 섬이었다.
그때는 인천의 연안부두라는 곳에서 관광5호란 여객선이 섬으로 연결되는 유일한 대중교통 수단이었다.
그러다 보니 섬을 떠나 육지로 나온다는 것은 대단한 이벤트였다.
방학 때 할머니 댁에 가기 위해 나오는 것 이외에는 기회가 그리 흔치 않았다.
그런 내가 인천이나 서울에 내 힘(?)으로 나올 기회는 일 년에 한두 차례 있는 백일장이나 웅변대회 같은 행사 때였다.
전교생이 1백 명 남짓 되다 보니 선생님 댁 자제라는 약간 옹색한 메리트와 나름 있다고 자부하던 글 솜씨 덕에
나는 가끔 서울구경, 인천구경을 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.
백일장을 앞두고 학교에서 사전 준비도 많이 시키고 했지만
실상 나는 백일장 자체에는 그다지 관심이 크지 않았던 것 같다.
어렴풋한 기억에 백일장에 나가서 상을 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.
하지만 담임 선생님이신 아버지를 따라 어린이 대공원에서 열렸던 백일장에 참석하러 가던 길에 탄 전철,
그리고 아버지께서 사주시던 자장면의 고소함은 또렷하다.
시간이 흘러 그 시절의 섬 소년은 그때 자장면을 사주시던 담임선생님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었고,
다행인지 소년은 시인이 되지는 않았고 그 소년의 담임선생님은 60의 나이에 시인으로 등단하셨고
6권의 시집을 내셨고 그 소년은 6집에서야 담임선생님의 시집 서문에 7집 8집 9집을 기대하는
애닮은 글을 올렸지만 그 담임선생님은 6집 시집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
더는 아프시지 않게 되었다.
소년에게 백일장은 글을 쓰는 대회가 아닌 세상을 내다보는 유리창이었다.
시간이 지나 이젠 모든 것이 아련하고, 그 소년은 이제 자장면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.
(이 글은 2016년 6월 이투데이에 기고했던 글을 일부 수정하여 작성했습니다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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